씨애틀인지 쉽게 잠 못 이루지 못하고 설치다가 새벽에 잠들었다. 눈을 떠보니 6시 30분. 완벽한 타이밍이다. 오리건주의 포틀랜드로 떠나는 버스가 아침 8시에 있으니 씻고 아침 챙겨먹고 터미널로 가면 넉넉하게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5분만 더 자기로 마음먹고 눈을 감았는데 50분을 더 자버렸다. 7시 20분. 그냥 쿨하게 오후 1시 버스를 타기로 마음먹었다. 혼자 다니니 이렇게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어서 좋다… 기보다는 나는 정해진 계획대로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렇게 무계획으로 마구 결정을 바꿔가며 하는 여행이 낯설지만 상관없다. 일단 씻고 어제와 똑 같은 메뉴의 호스텔 아침으로 든든히 배를 채웠다. 어짜피 빵과 과일인지라 금방 소화가 되버리겠지.
어제까지 이틀간의 여행을 블로그에 남기기 위해 사진과 글을 정리하고 페이스북을 하며 잠시 시간을 때웠다. 11시가 체크아웃 시간이라 잠시 쉬다가 여유있게 버스터미널에 도착해서 표부터 구해놓고 어제 못다한 시내구경을 다닐 생각으로 체크아웃 시간에 맞춰 체크아웃을 했다. 포틀랜드행 버스 출발 시간은 오후 2시. 백팩을 등에 짊어지고 한손에는 노트북가방을 들고 다른 한손에는 디카를 든 채로 그레이하운드 버스 터미널이 있는 다운타운까지 가는 도중 특이하게 생긴 큰 건물을 발견했다. 입구에 Return Book 이라는 회수통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이 바로 어제 깜빡하고 들러보지 못했던 씨애틀 도서관! 도서관이 한 건물을 차지하고 있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한 블록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었다. 일단 들어가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ESL 파티션에 가서 괜히 Advanced에 있는 책들 좀 훑어보다가 Korean 파티션에 가서 오래된 한국 책들이 전시된 것들도 보다가… 작은 소극장 같은 곳을 발견했다. Microsoft에서 기증한 Microsoft Auditorium 이란다. 씨애틀에 Microsoft 본사가 있어서 이런 기증도 받나보다. 사실 MS 본사도 들러보고 싶었는데 다운타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좀 외곽으로 나가야 했기에 그거 하나 밖에서 구경하려고 가보기엔 시간이 아까워서 가보질 않았었다.
초라한 씨애틀 그레이하운드 버스 정류장에 도착. 씨애틀이라는 이름과 다운타운의 수많은 고층 빌딩에 걸맞지 않게, 아주 작고 촌스럽고 조금은 지저분하기도 하다. 몇 년 전에 군생활 할 때 휴가때마다 들리던 옛 원주터미널이랑 흡사한 모습이다. 원주 터미널, 지금은 새로 바뀌어서 좋아졌다던데…
아직 승차 시간까지는 거의 1시간 가까이 남았는데 한 두 사람씩 줄을 서기 시작하자 너도 나도 따라 줄을 선다. 나도 잽싸게 순위권으로 줄을 섰다. 출발 30여분 쯤이 되자 줄이 길어서 아예 터미널 바깥까지 이어져있다. 한국인으로 보이는 어떤 여자분은 줄이 건물바깥까지 이어져있는데도 멀뚱히 벤치에 앉아서 기다리다가 직원한테 이 줄이 포틀랜드로 가는 줄이냐고 묻더니 뒤늦게 저 뒤로 가서 줄을 선다. 포틀랜드로 가는 줄 알았으면 내가 줄서라고 말해줬을텐데.
버스가 출발하고 얼마 안되서 창 밖으로 비가 쏟아진다. 아아… 이번 나의 여행은 비와 뗄 수 없는 인연인가보다. 자다가 눈뜨기를 열댓번 반복한 끝에 4시간여만에 포틀랜드에 도착했다. 터미널이 굉장히 넓고 깔끔하다. 도착하자마자 씨애틀에 도착했을 때 어리버리까던 때와는 달리 잽싸게 현재 위치 파악 후 미리 메모해두었던 포틀랜드 유스호스텔 위치로 향했다. 걸어서 12블록. 계속 도로를 건너는데 신호등이 없는 곳에서는 한국에서의 습관대로 일단 멈춰섰다. 하지만 그럴때마다 지나가던 차도 정지선에 멈춰서는 나보고 먼저 가라고 손짓하다. 오히려 차에게 양보하는 내가 약간 쌩뚱맞다는 표정이다. 작년에 캘리포니아 탐방 후 귀국했을 때, 공항에 나오자마자 미국에서 하던 대로 건널목에서 안심하고 건너다가 택시에 치일뻔했던 기억이 난다. 서양의 이런 보행자를 배려하는 문화는 본받아야 할 듯. 사람이 먼저지 차가 먼저가 아니니까.
쉽게 호스텔을 찾았다. 약간 펜션 같은 느낌이다. 씨애틀에서 같은 버스를 탔던 어떤 여자여행객이 짐이 너무 많아서 호스텔 앞 계단에서 낑낑대고 있길래 좀 도와줬다. 커다란 캐리어에 커다란 배낭에 이불을 들고온건지 2m는 되어보이는 초무거운 침낭백까지 들고있다. 세상에 덩치도 작은데 도대체 무슨 깡으로 이런걸 다 들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자기는 뉴질랜드에서 왔단다. 뭐 여하튼 이런 간단한 도움 주고 영어로 대화 좀 했다. 이런 사소한 것에 뿌듯함을 느낀다. 으하하.
이 곳에서의 하루 숙박은 단돈 24$. 씨애틀에서보다 12$이나 싸다. 대신 아침 제공이 없다는 것이랑 시설이 씨애틀에서보다 못하지만 그래도 지낼 만하다. 6인실을 배정받고 들어가보니 침대는 마구 어질러져 있는데 아무도 없다. 일단 저녁시간이므로 대충 짐을 정리하고 호스텔 직원에게 물어 근처에 있는 마켓으로 갔다. 아뿔사, 라면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완전 서양 마켓이다. 다운타운에 차이나타운이 있다던데 그 쪽의 마켓에나 가야 한국라면 구할 수 있을 듯. 달랑 하루 묵을 건데 뭐 재료 사서 요리를 하기도 마땅치 않고 뽀글이도 해먹을 수 없고 대체 뭘 먹어야 하나 고민하다가 뭐 치킨 어쩌고 저쩌고 라고 되어있는 냉동식품을 샀다. 전자레인지에 10분만 돌리고 먹으면 된다고 적혀있다. 군시절 PX에서 냉동먹던 그 때 그 시절이 기억난다.
바로 호스텔로 돌아오지 않고 동네를 살짝 돌아보았다. 유럽풍의 특이한 건물들이 많다. 유럽풍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유럽풍이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씨애틀과는 사뭇 다른 느낌. 호스텔로 돌아와 10분 돌려야 하는 냉동음식을 배가 고파서 9분만 돌리고 꺼내보았다. 치킨 덩어리 2조각이 양념이 되어있다. 기름기가 약간 고인 것이 그리 먹음직 스러워 보이진 않지만 나이프와 포크를 꺼내서 스테이크 먹듯 썰어먹었다. 젓가락이 있으면 참 좋으련만, 호스텔에 젓가락이 있을 리가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챙겨오는건데, 여기서도 첫 여행 티가 팍팍나고 있다.
아무도 없는 내 방에 들어와 포틀랜드 다음 목적지로 어디가 좋을지 찾아보고 있는데 어느 외국인이 들어온다. 맥주먹고 있는데 같이 먹자고 하길래 속으로 앗싸라비아를 외치며 따라나가서 맥주 한 캔 얻어먹고서 같이 맥주 먹던 녀석들과 밖으로 나갔다. 2명은 영국녀석, 2명은 미국녀석들. 밖에서 다같이 담배를 피며 서로 어디서 왔냐 어디어디 가봤냐 등을 묻는다. 물론 나는 비흡연자이므로 제외. 그러다 한국 이야기가 나오고 남북으로 갈라진 이야기를 하다가 나 군인이었다라는 말을 하자마자 난리가 났다. Cool, Awesome 등… 나랑 주먹도 부딪혀주고 안고 하면서 축제분위기다. 그리고는 사람 죽여봤냐고 묻는다. 내가 한국에선 개나소나 군대 다 가고 사람죽여본 군인 거의 없다고 했는데도 군인이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가보다. 대충 떠들다가 근처 펍으로 향했는데 펍 바로 앞에서 애들이 들어가길 머뭇거린다. 펍 앞에 만21세 미만 입장 불가라고 붙여져있다. 만 20세도 아니고… 나와 다른 한명을 제외하고는 다 만20세다. 이런 어린것들… 결국 들어가자마자 바로 튕겼다. 한 녀석은 직원한테 신분증을 보여줄 때 직원에 Sorry라면서 돌려주자 only one month 라면서 봐달라는 표정을 짓는다. 한 달 뒤에 만21세 된다는대도 얄짤없다. 결국 우린 24시간하는 타코 가게로 들어갔다. 멕시칸 음식 타코를 파는 맥도날드 같은 곳이다. 거기서타코 한 셋트씩 시켜먹었는데 딱히 한국인 입맛은 아니다. 약간 빵 쉰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테이블에 다섯이서 앉아서 내 귀에 들리는 영어는 50%가 Fucking 이었던 것 같다. 한국으로 치면 어린 것들이 입에 "존나"를 달고 사는 것마냥 모든 말에 Fucking을 붙이고 있다. 내가 계속 무슨 말하는지나 알아들어먹으면서 타코나 먹고 있자 나보고 왜 조용히 있냐고 묻는다. 난 그냥 너희들 말하는거 알아먹는거에 만족하고 있다니까 이제 나의 스피킹 차례란다. 나도 똑같이 Fucking을 써서 몇 마디 해줬다. Your speaking is fucking fast 등등 몇마디 해주자 또 난리났다. 영어 잘한다고 띄워주길래 신나서 Fucking 몇 번 더 넣어줬더니 내 영어는 완벽하단다. Fucking 쓰면 영어가 완벽해지다니, 영어 참 쉽다.
타코를 다 먹고 나니 더 이상 뭐 할게 없어서 그냥 숙소로 다시 들어왔다. 나는 내일 계획도 안세우고 다음 목적지도 아직 안정해졌기에 바로 내 방으로 들어와서 인터넷 검색질을 다시 시작했다. 일단 미국에서의 일정은 포틀랜드가 끝이었고, 다시 캐나다로 돌아가려는데 캐나다 서부로 가는 대부분의 경로는 밴쿠버를 다시 지나야 한다. 밴쿠버에서 씨애틀까지 내려오는데 4시간, 씨애틀에서 포틀랜드로 내려오는데 또 4시간이 들었으니, 최소한 여기서 밴쿠버까지 돌아가는데는 최소한 8시간이 걸린다. 딱히 내가 밴쿠버로 다시 가서 할 것은 없었기에 밴쿠버가 아닌 그 근처 도시로 가는데 가장 짧게 걸리는 곳이 14시간씩 걸린다. 밴쿠버나 씨애틀에서 몇시 간씩 다음 갈아탈 버스를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있기때문이다. 안그래도 짧은 9박 10일인데 버스안에서 시간 다 보내게 생겼다. 뭐 어쩔 수 없이 빅토리아로 향하기로 했다. 소요 시간은 밴쿠버 터미널에서 새벽에 5시간 대기할 각오를 하고 총 18시간 소요. 하루 숙박비는 노숙으로 아낀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로 했다. 호스텔에서 얻은 포틀랜드 관광지도에 내일 들릴 주요 장소들을 펜으로 표시하고 잠들 준비를 해야겠다. 이미 밤 12시가 넘은 시간. 부엌에서 남은 맥주를 처리하던 녀석들이 한 명씩 들어와 곯아떨어진다.